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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1179
한자 剡溪書院
영어공식명칭 Seomgye Private Confucian Academy
영어음역 Seomgye Seowon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 445-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태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07년 12월 28일연표보기 - 섬계서원 경상북도 기념물 제160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섬계서원 경상북도 기념물 재지정
건립 1802년연표보기
훼철|철거 1864년연표보기
개축|증축 1914년연표보기
관련 사항 1961년연표보기
관련 사항 1996년연표보기
현 소재지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 445-1 지도보기
성격 서원
정면 칸수 4칸[경의재]|1칸[세충사]
측면 칸수 2칸 반[경의재]|1칸 반[세충사]
문화재 지정번호 경상북도 기념물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서원.

[개설]

서원 이름을 섬계(剡溪)라 한 까닭은 이 마을 이름이 섬계리(剡溪里)였던 데서 비롯된다. 섬계서원단종 복위를 꾀하다 순절한 충의공(忠毅公)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충절을 숙모(肅慕)하고 현창하고자 창건했다. 지금은 조룡리로 바뀐 섬계리는 김문기를 중시조로 하는 김녕 김씨 집성촌이다.

[위치]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 양지마을[양지말] 뒷산 기슭에 남동향하며, 앞으로는 낙동강 지류 중 하나인 감천(甘川)으로 합류하는 조룡천(釣龍川)[봉곡천]이 흐른다.

[변천]

1802년(순조 2) 지방 사림이 주동이 되어 각도 사림과 힘을 모아 건립했다. 섬계서원을 세울 때, 성균관대사성 이노춘(李魯春)이 쓴 상량문과 1898년 송근수(宋近洙)가 쓴 백촌선생원허비문(白村先生院墟碑文) 등에 의하면, 백촌 김문기와 그 맏아들 여병재(如甁齋) 김현석(金玄錫)을 추모하고자 세운 섬계사(剡溪祠)에 뿌리를 둔다. 하지만 1864년 서원철폐령으로 헐리자 1898년에는 그 자리에 백촌선생원허비문을 건립했다.

이어 1914년에 경의재(景毅齋)를 세우고 1961년에는 정침(正寢)인 세충사(世忠祀)를 복원했으며 1996년에는 동별묘(東別廟)를 다시 세웠다. 세충사에는 백촌 김문기를 주벽으로 하고 맏아들 영월군수 김현석을 배향하며 동별묘에는 영남삼현(嶺南三賢)이라 일컫는 반곡(盤谷) 장지도(張志道), 절효(節孝) 윤은보(尹殷保), 남계(南溪) 서즐(徐騭)을 추가로 배향했다. 향사는 원래 봄과 가을 두 차례 봉행하다가 십 수 년 전부터 3월 중정일(中丁日)에서 가까운 주말 하루를 택해 한 번만 한다.

[형태]

경내는 강당과 사당 구역으로 대별되며 경내로 진입할수록 표고가 높아져 산으로 닿는다. 중심 건물에 해당하는 경의재는 석축 기단 위에 섰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 반의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 구조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이며 내진주(內陣柱)가 있고, 양쪽 협간은 온돌방으로 구성했다. 세충사와 동별묘는 그 동편에 위치한다. 원래는 세충사 구역에는 별도 담장을 둘러 구분했지만, 십 수 년 전에 수리할 때 없앴다.

하지만 경계의 흔적은 지금도 있어 남쪽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박공와 구조인 불이문(不二門)을 들어서면 그 전면에 세충사가 있고 동편에 동별묘가 있다. 세충사는 정면 1칸에, 측면 1칸 반의 겹처마 박공 기와지붕 구조로 전면 반 칸에는 툇마루를 깔았다. 어간 내부 뒷면에 김문기의 영정을 걸어 주향하고 우측 협간 측면에 그의 맏아들 김현석을 배향한다. 동별묘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박공기와지붕 구조이며 기둥은 모두 원주(圓柱)를 사용했다.

[현황]

대숲과 각종 수풀로 우거진 야산을 배경으로 전면을 관통하는 조룡천을 조망하는 산기슭에 위치한다. 서원 구역은 석축 담장으로 외부와 경계를 표시한다. 지금의 담장은 최근 두어 차례 전면 수리를 거친 형태이며, 1970년대 이전에는 토석 혼축에 기와를 얹은 구조였다. 지방도와 인접한 남쪽 정문에 ‘유의문(由義門)’이라는 현판을 달고 태극 문양을 그린 솟을대문을 지나서 경내로 진입한다. 이 대문 전면 왼편에는 최근에 세운 기념비인 섬계서원지방문화재지정기념비가 있다. 유의문을 들어서면 정원을 지나 석축 단(壇) 위에 자리를 잡은 경의재가 나타난다.

경의재 전면 중앙에는 ‘섬계서원(剡溪書院)’이라는 편액과 ‘경의재(景毅齋)’라는 편액이 나란히 걸려 있다. 경의재 전면 왼편에 백촌선생원허비문(白村先生院墟碑文)이 있고, 그 전면에는 최근에 전통 건축으로 만든 화장실이 있다. 원래 이곳 화장실은 정원 동편에 있었지만, 없앴다. 원허비문 뒤쪽에 천연기념물 제300호인 금릉 조룡리 은행나무가 있다. 경의재 동편에 정침인 세충사와 동별묘가 있다. 산으로 이어지는 북쪽 담장 뒤편에는 대나무숲이 우거졌다. 동편 담장 구역 밖은 마을 인가와 인접한다. 경의재에는 꽤 많은 책판이 있었지만, 1980~1990년대에 모두 도난당했다.

2007년 12월 28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6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매년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에 가까운 주말을 택해 유림향사로 시제(時祭)를 봉행한다.

[의의와 평가]

섬계서원김문기가 신원(伸寃)되고 관작(官爵)을 회복한 후 최초로 그를 배향해 세운 서원이다. 김문기의 행적을 정리한 『백촌선생실기(白村先生實記)』에 의하면, 백촌은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에서 세거(世居)했지만, 단종 복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그의 후손이나 종족으로 지례(知禮)로 옮겨 거주하는 이가 많았다. 섬계서원은 이렇게 형성된 김녕 김씨 집성촌이 그 중시조를 기리고자 창건한 사당에 뿌리는 두는 것으로 지금도 이를 추념하는 시제(時祭)를 문중에서 간단없이 봉행한다는 점에서 조선 시대 집성촌의 역사와 이를 둘러싼 향촌 사회의 동향, 그리고 단절 없는 전통을 보여 주는 좋은 보기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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