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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234
한자 太和里
영어음역 Taehwa-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태화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기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1914년연표보기
변천 1949년연표보기
변천 1988년연표보기
변천 1995년연표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6.64㎢
가구수 216세대[2015년 12월 31일 기준]
인구(남, 여) 509명(남자 254명, 여자 255명)[2015년 12월 31일 기준]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충청북도 황간군 황남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경상북도 김천군 봉산면 태화동으로 개편되었고, 1949년 금릉군 봉산면 태화동이 되었다.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태화리가 되었고, 1995년 김천시 봉산면 태화리가 되었다.

[현황]

태화리는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6.64㎢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216세대에 509명(남자 254명, 여자 25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 덕천리, 서쪽으로 대항면 복전리, 북서쪽으로 신암리와 이웃하고 있다. 태화1리·태화2리·태화3리 세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다. 국도 4호선경부고속국도가 마을을 관통하고, 태화천 주변으로 비옥한 농경지가 형성되어 벼농사와 포도 재배가 주로 이루어진다. 문화 유적으로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9호인 금릉 태화리 석조보살입상, 가막사지 석탑, 영일 정씨 봉계 입향조인 정이교(鄭以僑)와 후손 50여 위를 모신 선산과 재실인 태평재가 있다.

자연 마을로는 봉명(鳳鳴)·태평(太平)·창촌(倉村)[일명 창마을·창말]·평촌(平村) 등이 있다. 봉명은 가막사(可幕寺) 또는 감막사(柑幕寺)가 있어 가막리·가매기 등으로 불리다가 어감이 좋지 않다는 여론에 따라 길조(吉鳥)인 ‘봉황새 봉(鳳)’자를 써서 붙인 이름이다. 아침에 해가 떠 비추는 마을인 양지마[일명 양지뜸], 나중에 해가 비치는 맞은편 마을인 음지마[일명 음지뜸]로 이루어졌다. 1710년 양지마에 충주 박씨가 옮겨 오고 이후 영천 최씨와 해풍 김씨가 차례로 입향한 이래 지금은 충주 박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태평은 조선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세조의 탄압을 피해 피난을 가다가 하룻밤 묵어가자 이를 영광스럽게 여긴 마을에서 태평성대를 누리기를 바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태평 뒤 재궁골에는 영일 정씨 문중의 선산과 재실이 들어서기까지의 내력이 담긴 유명한 전설이 전해 온다.

재궁골은 원래 태평사가 있던 명당으로 옛날 봉계의 대표적인 명문가였던 영일 정씨 집안과 본관이 알려지지 않은 황씨 집안이 서로 재궁골 일대의 명당을 얻기 위해 경쟁을 하였다. 그러던 차에 황씨 집안의 황울산(黃蔚山)이 절터를 차지할 요량으로 “동짓달 그믐밤에 절 지붕에서 송아지가 울면 절이 망한다.”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법당 지붕에 몰래 송아지를 올려놓으니, 그 뒤로 차츰 승려들이 떠나고 태평사는 망해서 황씨 집안의 소유가 되었다.

이후 두 집안에서 거의 동시에 초상이 났는데 영일 정씨 문중에서 묘책을 세워 재궁골에 산소를 먼저 모시자 황울산이 “이 터는 내 것이 못 되는구나.” 하고 탄식하며 마을을 떠나니 재궁골은 영일 정씨 문중 소유가 되고 절이 헐린 자리에는 재실인 태평재를 세웠다고 한다.

평촌은 옛날 서울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손들이 영동에서 김천 지방으로 내려오자면 황악산에서 추풍령 사이에 있는 도둑골 개방이재를 넘어야 했는데, 개방이재에는 도둑골이란 명성에 걸맞게 산적이 많아 늘 공포의 대상이었다. 다행히 이 마을까지만 오면 안심이 되어 심신이 평화로워진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지매골에 속한 평촌·창촌·상금·점리·사기점 등 인근 다섯 개 마을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어 하리(下里)라고도 한다.

약 300년 전 창녕 조씨 문중의 선비가 봉계에서 옮겨 와 처음 마을을 이루었다. 김천에서 영동으로 넘어가는 교통의 요지여서 주막이 번성하였고, 특히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이 상경할 때는 이름이 불길한 낙고개를 피해 다른 곳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는 대부분 이 평촌 주막으로 와서 유숙하고 가는 것이 보편화되어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창촌은 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평촌과 마주 보고 있다. 옛날 마을 창앞산 앞에 약 159.3㎡ 되는 군량미 창고가 있어 붙인 이름이다. 군사 시설인 이 창고를 가리기 위해 창고 앞에 많은 나무를 심어 수십 년 전까지도 아름드리나무로 이루어진 숲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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