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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1881
한자 柴將軍碑
영어음역 Sijanggun Bi
영어의미역 Sijanggun's Monument
이칭/별칭 미륵암 출토 시장군비,당 시장군 정사초당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월명리 203-1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
집필자 김창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1999년연표보기
건립 660~668년
현 소재지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216 직지성보박물관지도보기
원소재지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월명1리 203-1 미륵암지도보기
성격 비편
관련 인물 시철위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61㎝×68㎝[당 시장군 정사초당비]|58㎝× 57㎝[무명비 제1석]|34㎝×28㎝[무명비 제2석]
소유자 직지성보박물관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월명리에서 발견된 삼국 통일 전쟁 시기 시장군의 비.

[개설]

시장군(柴將軍)은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 보이는 당나라 장군 시철위(柴哲威)로 추정되는 인물로, 당 태종의 외척인 시소(柴紹)의 아들이다. 삼국 시대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가림도행군총관(加林道行軍摠管)으로 김천 방면에 주둔하고 있을 때 고구려 정벌 명령을 받고 함자도행군총관(含資道行軍摠管)에 임명되었다.

[건립 경위]

시장군 비는 시장군이 함자도행군총관에 제수되자 정사초당(精舍草堂)을 짓고 그것을 기념하고자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위치]

1999년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월명1리 203-1번지 미륵암에서 발견되었다. 미륵암은 단칸의 작은 암자로 불전 안에 큰 석불이 하반부가 매몰된 채 있었는데, 하반부를 노출시키기 위하여 불전을 철거하고 불상 주변을 발굴하던 중 시장군 비 비편 세 개를 수습하였다. 미륵암은 비편에 나오는 정사초당으로 여겨진다.

[형태]

세 개의 비편 가운데 가장 큰 비편은 한 행 21자로 이루어진 15행이 새겨져 있다. 형태는 거의 장방형으로 위쪽은 완전하고 아래쪽과 옆쪽은 결실된 형태이다. 이 비편은 시장군 비 오른쪽 윗부분에 해당하므로 시장군 비 하단과 왼쪽 가장자리가 파괴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가림도행군총관 시장군이 정사초당을 건립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건립자가 당나라의 장수였던 내용에 기초하여 당 시장군 정사초당비(唐柴將軍精舍草堂碑)란 명칭을 부여하였다. 나머지 두 개의 비편은 내용상 성격이 드러나지 않아 무명비(無名碑) 제1석과 제2석으로 분류하였다.

[금석문]

시장군 비를 비롯한 여타 금석문 자료의 비문은 내용이나 성격으로 미루어 적어도 7세기 후반 삼국 통일을 전후한 시기의 중요한 기록으로 여겨진다. 시장군 비 건립 시기는 백제가 멸망한 660년에서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 사이로 추정된다. 그 이후가 되면 당나라와 신라의 관계가 백제 통치를 놓고 더욱 치열한 대립기로 들어서면서 신라 영토에 당나라 장수의 비를 세우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비문 가운데 ‘금월십일일유신라사(今月十一日有新羅使)’라는 제8행의 내용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판독된 비문 가운데 시장군은 백제를 침공할 때 가림도행군총관이 되었다가 이후 고구려를 침공할 때는 함자도행군총관으로 활약했는데, 이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이다.

비문은 가장 큰 비편인 당 시장군 정사초당비에 “함자도총관시장군정사초당지명□□위천최신(含資道摠官柴將軍精舍草堂之名□□謂天最身)/ 호천일무상백년비홀서천역왕풍촉난정유□□로(乎千日無常百年飛忽逝川易往風燭難停攸露□□)/ 신납수미어개자□□포해수어미진입내자□□□(神納須弥於芥子□□包海水於微塵込內慈□□□)/ 염흥상즉획선인경심례경수복무량소이선각지사(念興想卽獲善因傾心禮敬受福無量所以先覺之士)/ 정사초당자가림도행군총관시장군지소조장군자(精舍草堂者加林道行軍摠管柴將軍之所造將軍者)/ 무황제지외손태종문황제지외생황제지외(武皇帝之外孫太宗文皇帝之外甥皇帝之外)/ 전기이자친중우다재예지봉명조진압번갈□(前基以玆親重又多才藝祗奉明詔鎭壓藩羯□)/ 묘연첨망궐정장수양병이금월십일일유신라사(杳然瞻望闕廷長愁養病以今月十一日有新羅使)/ 원용삭철위용연몽수함자도행군총관개지경희불(元龍朔哲威庸愞蒙授含資道行軍摠管開之驚喜不)/ 족도무유신경앙빙삼보용내소진자차복전기수만(足蹈無由申慶仰憑三寶用乃消塵藉此福田冀酬万)/ 구초당일구서사법계명승진석운초함령동식영유(區草堂一口庶使法界名僧振錫雲草含靈動植永有)/ 법왕자재응변무궁불생불멸비실비공적선백마□(法王自在應變無窮不生不滅非實非空跡宣白馬□)/ 항다유피예맥천식신라황혁사노명장수가공수(恒多惟彼穢貊蚕食新羅皇赫使怒命將受柯龔受)/ 망국지□축윤문윤무온고지신숙식덕본항수선업(望國之□祝允文允武溫故知新宿植德本恒脩善業)/ 공이□□□원□조궁극□□□□진□□구면용□(拱離□□□願□鳥窮極□□□□眞□□衢面用□)”라고 쓰여 있다.

두 개의 비편은 훼손되어 알아볼 수 없는 글 가운데 무명비 제1석은 ‘파일(破日), 강양가(强梁加), 당산도행군(唐山道行軍), 노상이천인(路上二千人)’ 따위의 글이, 무명비 제2석은 ‘태신(太臣), 번루(繁縷), 고려변동(故慮變動), 신라지침여환(新羅之侵如還), 장군□□대경(將軍□□戴經), 화□□□군(火□□□軍), 서산동(鼠山東)’ 따위의 글이 새겨져 있다.

[현황]

시장군 비는 현재 대항면 운수리 직지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999년 3월 5일 동국대학교 장충식 교수가 탁본을 하였다.

[의의와 평가]

기존의 당나라 장수와 관련된 비가 발견된 지역은 백제의 도성인 부여에 국한되었으나 시장군 비가 발견된 지역은 경상북도 성주에서 대구 또는 김천으로 넘어오는 길목이자 우리 역사상 나제통문(羅濟通門)과도 연결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어서 눈길을 끈다. 앞으로 비문의 주인공인 시철위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구명하는 작업이 필요하고 여겨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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