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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악산구곡 가사문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30095
한자 黃嶽山九曲 歌辭文學
이칭/별칭 황남구곡
분야 문화유산/기록 유산,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민경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7세기 중엽 - 김천 구성 공자동 계곡에서 초당(草堂) 이장원(李長源)이 「구곡단가」를 짓고, 호상(湖上) 여석홍(呂錫洪)이 구곡의 바위 곳곳에 시를 남김.
저자 생년 시기/일시 1759년연표보기 - 이관빈 출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8세기 말엽 - 「황남별곡」
저자 생년 시기/일시 1827년연표보기 - 윤희배 출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9세기 말엽 - 「황산별곡」
저자 몰년 시기/일시 1900년연표보기 - 윤희배 사망
배경 지역 황악산구곡 -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지도보기
성격 가사문학
작가 이관빈|윤희배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황악산을 배경으로 쓴 조선 후기 가사문학.

[개설]

황악산구곡은 김천 황악산의 서남쪽 구성·지례·증산·대덕·조마·양천, 넓게는 감천 일대를 말하며 ‘황남구곡’이라고도 이른다. 이곳을 배경으로 이관빈(李寬彬)[1759~?]이 장편 가사(歌辭) 「황남별곡(黃南別曲)」, 윤희배(尹喜培)[1827~1900]가 「황산별곡(黃山別曲)」을 썼다. 「황남별곡」은 18세기 말에 산수와 도학의 상호 관련성을 길게 고찰하고 김천 황악산구곡의 승경을 차례로 읊은 도학가사이며 여정을 차례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기행가사, 좋은 땅을 찾아 살 곳을 정함으로 보아 은일가사라 할 수 있다. 구곡은 제1곡 백장층암, 제2곡 문도동, 제3곡 저닉촌, 제4곡 귀영곡, 제5곡 백어리, 제6곡 안연대, 제7곡 자하령, 제8곡 공자동, 제9곡 주공동이다.

「황산별곡」 은 「황남별곡」보다 반세기 이상 뒤에 나왔다. 19세기 후반 홍선대원군 시절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황남별곡」을 전범으로 삼아 개작한 151구의 장편가사다. 산수를 통해 도의 근원을 읊고 중국과 동방의 도통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면서 황악구곡의 승경을 노래했다. 그 내용 80% 이상이 「황남별곡」과 부합하여 두 가사작품 간에는 상호 텍스트성이 다분하다.

[구성]

「황남별곡」은 산수와 도학의 관계를 해설하는 서사, 중국 도학의 계통을 두루 살펴보는 본사1, 조선의 도학을 회고하며 닮고자 하는 본사2, 황악산의 구곡을 유람하며 도학을 고찰하는 본사3, 도학 하는 삶을 다짐하는 결사로 구성돼 있다. 본사에서 김천 황학산구곡의 경치를 구체적으로 노래한다.

「황산별곡」은 3·4, 4·4조 율격 151구로 표현된 장편가사다. 서사, 본사1, 본사2, 결사의 기·승·전·결 구성을 취했다. 19세기 언어를 반영한 정격양반가사로 순한글체와 국한자혼용체 두 가지 필사본이 전한다.

[내용]

「황남별곡」은 2음보 1구, 전 324구로 표현된 장편 가사이다. 서사에서 산수와 도학의 관계를 장황하게 해설한다. 본사에서는 중국 도학과 조선 도학의 관계를 두루 살피며 닮고자 하다가, 황학산 남쪽 아홉 구비 하나하나를 차례로 유람하며 도학을 고찰한다. 결사에서 도학하는 삶에 대한 다짐을 보인다.

「황산별곡」은 151구 중 127구가 「황남별곡」과 거의 일치하거나 닮아있다. 이렇게 산수를 통해 도의 근원을 찾아가는 심경을 읊은 「황남별곡」의 일부를 살펴보자.

이곡(二曲)

 한 구비 도라가니 /洞名(동명)이 드른 라/ 村名(촌명)이 遐高(하고)/이  아니 奇絶(기절)가/ 聖遠言堙(성원언인) 하올 예/道(도)를 듯기 쉬울손가/아참의 道(도)를 듯고/夕死(석사)라도 可矣(가의)로다/겻테 람 들어보소/이러한 峽中村(협중촌)의/이 道理(도리)를 능히 아니/그 아니 귀할손가

삼곡(三曲)

 한 구비 도라가니/마을 압폐 밧 가나니/아참 가라 上坪田(상평전)과/전역 가리 下坪田(하평전)을/張沮(장저)련가 桀溺(걸닉)인가/이 골 안에 슘엇다가/問津者(문진자)를 웃지 마쇼/天縱聖人(천종성인) 그 뉘 알리/禽獸同羣(금수동군) 못하려든/過於忘世(과어망세) 무삼일고/진짓 道(도)를 못 드르면/그릇 듯기 쉬우리라

오곡(五曲)

져 골 안의 져 마을은/伯魚里(백어리)라 遺傳(유전)니/學詩學禮(학시학례) 問答(문답) 말삼 /丁寧(정녕)이 親聽(친청) 듯/ 一邊(일변)으로 각니/修短(수단)이 天命(천명)이라/大成至聖(대성지성) 우리 夫子(부자)/逆理痛(역리통)은 무삼 일고

[의의와 평가]

「황산별곡」 은 「황남별곡」을 흡수하여 변형, 융합한 작품으로 대부분의 내용이 같거나 일치한다. 동방 도학을 노론의 관점에서 서술한 「황남별곡」을 남인의 관점에서 수정, 환치시킨 정격 양반가사란 평을 받는다. 두 가사작품은 김천이 우리나라 성리학 최초의 확산지역이며, 영남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을 배출한 고장이란 평을 받게 되는 실증적인 예이다. 김천은 재래로 선산, 성주, 대구, 황간 등지와 소통하며 유교 문화를 확산시켜 왔다. 이러한 실천 유학 정신은 문학작품과는 물론 만세운동, 파리장서 사건 등의 항일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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