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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31년 4월 25일자에는 최송설당 과 김천 의 만남을 “적막(寂寞)의 김천 을 활기(活氣)의 김천 으로, 초야(草野)의 김천 을 ...想)의 김천 으로”라고 하였다. 또 『동아일보』 1939년 8월 17일자에는 최송설당 의 “유업(遺業)은 천추(千秋)에 그 빛을 남길 것이고, 공덕(功德)과 방명(芳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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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출신 최송설당 이 일제 강점기에 펴낸 문집. 최송설당(崔松雪堂) [1855~1939]은 조선 중기의 학자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의 11대손이자 부호군을 지낸 최봉관(崔鳳寬) 의 증손녀로 아버지는 지남거사(只南居士) 최창환(崔昌煥) [1827~1886], 어머니는 경주 정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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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김천 출신인 최송설당 이 지은 한글 애향 가사. 「금릉풍경」 은 조선 후기에 태어나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하의 불운한 시기를 살다 간 김천 의 여류 교육자요 작가였던 최송설당(崔松雪堂) [1855~1939]이 지은 애향·축원 가사이다. 금릉(金陵) 이란 김산(金山) [현 김천 ]의 고호(古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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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3월 17일 김천고등보통학교 가 고등보통학교 5학년제로 인가되어 5월 9일 개교하였다. 김천고등보통학교 는 일제 강점기 김천 지역 민족 교육의 산실로 설립자 최송설당 이 학교 설립에 필요한 부지와 금전을 제공함으로써 설립되었다. 일제가 민족 교육을 약화시키기 위해 실업학교 설립을 주장하자 최송설당 이 “우리 젊은 사람들에게 민족 사상 교육을 시키기 위해 학교를 설립하는데, 그 목적이 아니면 재산 기부를 취소하겠다”라고 표명할 정도로 민족 교육 기관의 설립을 열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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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김천 지역에서 활동한 교육가. 1931년 김천고등보통학교 [현 김천중학교 , 김천고등학교 ]가 최송설당 등 조선인에 의해 설립되자, 김천 경제를 좌우하던 일본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대일본부인회 김천분회장 이와다(岩田) 는 김천 , 상주 , 선산 등지의 대일본부인회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시답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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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7년 5월 사법서사회 회장에 뽑혔다. 1930년 2월 송설당교육재단 및 김천중학교 창립 상무를 수임하였고, 4월 김천군 학교 평의원에 피선되었다. 최송설당 이 1930년 32만 원이란 거금을 내놓아 김천공립보통학교 [현 김천고등학교 ]를 설립할 당시 김천 유지인 이한기 를 불러 학교 설립의 뜻을 밝혔다. 이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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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종2품 시종원부경[칙임관 3등]이 되었다. 저서로 『남가록』 을 남겼다. 정환덕 이 고종 과 순종 을 최측근에서 보필한 인물인 만큼 『남가록』 에는 정사에는 나오지 않는 궁중 비사가 풍부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김천 지역의 대표적 인물인 최송설당 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으나 정사가 아닌 궁중 비사인 만큼 신뢰도는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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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집행위원회에서는 고등보통학교 설립 기금을 30만 원으로 정하고 면과 리·동까지 확대했으나 사업 추진이 여의치 못했다. 이후 1930년 2월 23일 서울 에 살던 최송설당 이 재산 관리인 이한기 를 통해 고등보통학교 설립 기금으로 32만 원을 투척한다고 밝혔으나 조선총독부 의 한국인 교육 억제책으로 인문계 학교 설립 허가를 하지 않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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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한다. 1931년 4월 정열모 는 김천 에서 설립된 사립 김천고등보통학교 의 교무주임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천고등보통학교 는 영친왕 의 보모 출신인 최송설당 이 재산을 기부하여 설립한 학교였다. 그는 김천고등보통학교 에서 교무주임으로 근무하면서 조선어와 조선사와 수신을 강의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32년 1월 김천고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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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인재를 양성하였으나 6·25전쟁을 맞아 교사가 소실되고 개교 27년 만에 금릉학교 는 운명을 다하였다. 민족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이러한 노력들과 더불어 1930년 최송설당 여사와 이한기 사이에 체결된 학교 설립에 관한 논의를 바탕으로 김천고등보통학교 가 설립되었고, 1935년에는 김천여자고등학교 의 전신인 김천공립고등여학교 가 ...